국제 일본인 17명 잡혀갔다… 中 간첩몰이, 한국인으로 타깃 옮겨와

페이지 정보

작성일 24-10-30

본문

기업인·학자 10년간 무더기 체포

美·日에서 한국으로 타깃 옮겨와

반간첩법 적용, 한국인도 첫 구속



중국 정부가 반(反)간첩법 위반 혐의로 한국인이 체포된 사실을 29일 확인했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한국 시민이 간첩죄 혐의로 중국의 관할 당국에 체포됐다. 중국은 법치국가로, 법에 따라 범죄 활동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외교 소식통은 “2014년 중국 반간첩법 제정 이후 한국인이 이 법에 따라 구금된 첫 사례”라고 했다. 삼성전자 출신으로 중국 허페이시에 거주하며 중국 반도체 기업에서 일했던 50대 한국 교민 A씨는 지난해 12월 자택에서 연행됐고, 지난 5월 정식 구속돼 허페이의 구치소에 갇혔다.


중국이 자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하자 중국서 활동하는 기술 산업 종사자 등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리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9년 만에 개정된 반간첩법은 적용 범위가 모호하고 광범위하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는데, 실제 한국인의 구속 사례가 나오면서 중국에 있는 한국 기술 산업 종사자 등의 활동은 제약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한·미·일 밀착을 경계해 온 중국이 한국을 대상으로 ‘간첩 몰이’라는 새 협상 카드를 악용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은 그동안 주로 일본에 반간첩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면서 외교 지렛대로 활용해 왔다. 중국에서 2014년 반간첩법이 처음 시행된 이후 일본인 최소 17명이 법에 따라 처벌됐다. 대부분 학자와 기업인이었다. 일본인에 대한 간첩죄 적용은 동중국해·대만 문제로 양국 관계가 악화하는 시기에 집중됐다.중국에서 반간첩법에 따라 구속된 외국인들이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반간첩법을 적용받은 일본인들은 기소 이후 예외 없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외교 협상을 통해서만 석방될 수 있었다. 최근 만난 베이징의 일본인 외교 소식통은 “주중 일본 대사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간첩죄로 복역 중인 일본인 정기 접견”이라고 했다.


지난해 3월 베이징에서 체포돼 9월 형사 구류된 일본 제약 회사 아스테라스 중국 법인의 일본인 간부 사례는 중국이 반간첩법을 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한 경우로 꼽힌다. 체포된 남성은 중국에서 20년 넘게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중국일본상회 부회장을 맡기도 한 ‘중국통’ 일본인이다. 그가 체포된 다음 달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베이징을 찾아 당시 중국 외교장관이던 친강과 만나 이 남성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중국 당국에서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원론적 답변을 받는 데 그쳤다. 오히려 하야시와 만난 중국 고위 당국자들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중·일 관계를 구축하기 바란다”고 압박했을 정도다. 동중국해에서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이 커지던 시점이었다. 면책 특권을 갖는 외교관도 반간첩법을 피하기 어렵다. 지난해 2월 베이징에선 일본 외교관이 간첩 의심을 받던 중국 언론인과 식사하다 한 호텔 방으로 끌려가 조사받았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다른 서방 국가 국민에게 반간첩법을 적용한 사례도 적잖이 공개됐다. 올해 초 중국 방첩 당국인 국가안전부는 중국에서 45년 동안 근무한 영국인 기업가 이언 스톤스가 해외에 불법적으로 정보를 판매한 간첩 혐의로 중국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고 밝혔다. 재판이 끝난 지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 갑자기 공개한 사실이다. 이에 대해선 영국에서 발생한 ‘중국 스파이 사건’을 희석하고자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영국 경찰이 의회의 한 연구원을 간첩 혐의로 조사하는 등 영국 내 중국 스파이 논란이 점화됐다. 간첩 혐의로 3년 동안 구금된 중국계 호주 언론인 청레이는 지난 6월 풀려났는데, 이는 중·호 관계 회복 시기와 맞물린다.


중국이 한·미·일 밀착과 한반도 문제 등으로 복잡해진 한·중 관계 속에서 자국 내 한국인들을 ‘외교 인질’로 삼아 대중(對中) 정책 변화를 촉구하거나 유리한 협상을 벌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한·중 간에는 반도체·제약 등 첨단 기술 분야의 교류가 빈번해 이와 관련한 한국인 기술 종사자들의 안전이 위태로워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사건을 보면, 중국이 이전까지 한국의 기술자나 고급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간첩 몰이’를 자제했던 관례가 사실상 깨졌기 때문이다. 개정 반간첩법 시행 초기만 하더라도 해외 학자와 외신들은 이 법이 중국과 관계가 껄끄러운 일본이나 미국·영국·캐나다 등 서방 강국들을 겨냥할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중국이 ‘기술 돌파’를 추구하면서 한국에 대한 첨단 기술 의존도를 낮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의 한 기업인은 “한국 기술자들이 중국에 대한 보이콧이 일어날 위험이 있는데도 중국 당국이 반간첩법 적용을 강행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 기업과 협력하는 중국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반간첩법을 통해 노리는 부수적 효과다. 미국 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중국 국적 50세 여성 에밀리 천이 지난해 12월 간첩 혐의로 구금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천은 거주지인 카타르 도하를 떠나 지난해 12월 중국 난징 루커우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다 갑자기 사라졌다. 남편인 미국인 마크 렌트씨에 따르면 천씨는 가족에게 메시지를 보내 “착륙했지만, 공항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애국주의가 퍼지면서 외국인에 대한 시선은 점점 험악해지고 있다는 점도 중국서 활동하는 한국인에겐 부담이다. 외신 기자는 중국을 왜곡하는 선동가로, 외국 기업인은 중국의 고혈을 빼먹는 자본가나 첨단 기술을 노리는 첩보원으로 보는 시각이 만연하다. 오래 알고 지낸 중국인 사업 파트너나 학자가 갑자기 만나기를 거부했다는 이가 적지 않다. 일부 중국인 사이에서 ‘외국인은 곧 간첩’이란 인식도 생겨나는 상황이다. 국가안전부는 최근 대학생들에게 간첩 식별법을 교육하고 있다.


☞중국의 ‘반간첩법’


중국이 2014년 이후 9년 만에 개정한 간첩 행위 처벌법. 작년 7월 시행했다. 종전 5장(章) 40조항에서 6장 71조항으로 늘리면서 간첩 행위의 범위는 넓혔고 처벌은 강화했다. 개정법에선 간첩 행위 적용 대상이 ‘국가 기밀·정보를 빼돌리는 행위’에서 ‘국가 안보·이익과 관련된 자료 제공’으로 확대됐다. 국가안보기관의 조사·권한을 확대했고 간첩죄가 성립하지 않아도 행정구류 같은 처분이 가능하도록 했다. |조선일보|